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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유교

[삼국시대]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유학이 서기 372년보다 훨씬 이전에 수입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유학사상은 그 이전 한사군(기원전 108년) 이래로 한대의 문물제도와 학술사상을 전반적으로 인식했다고 볼 것이다. 왕경(王景)은 낙랑사람으로 『주역』에 능통하였으며 천문과 술수를 잘 알았고 다른 기예도 많았으므로, 한나라 명제 때에 치수(治水)에 많은 공을 세워 노강태수의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벌써 낙랑시대만 하더라도 중국고전에 능통한 학자들이 많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 이전으로 올라가 위만조선이나 『위략』에 보이는 연소왕 29년(B.C. 283) 조선 후왕과 연나라와의 국제외교관계 속에 주례에 의한 유교사상이 엿보인다. 고구려인들은 유학의 오경과 삼사, 『삼국지』 등을 읽었으며, 담징은 일본에 건너가 명화를 그렸을 뿐 아니라 『일본서기』에 보면 오경에 능통하고 회화에 능했으며, 종이와 먹과 색채와 맷돌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오경을 중심으로 하는 유학사상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선덕여왕 9년(640)에 당태종이 국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학을 크게 증축하고 해내외의 유학생을 모집할 때 유학생을 보내기는 하였으나 국학설립은 비교적 늦어서 신문왕 2년(682)에야 실시되었다. 국학의 교과내용은 『삼국사기』 [국학조]에 자세히 나온다. 그 내용은 주로 유교 경전이었으며, 특히 『논어』와 『효경』이 각급 학생의 필수 교양과목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진흥왕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왕으로서 그 시대에 화랑들이 생겨났고, 사방의 국경을 확장하고 순수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을 보면 고신도적 요소가 있지만 그 중에는 특별히 『논어』에 있는 "수기이안백성(修己以安百姓)"과 같은 유교의 정치철학과 그 용어가 무수히 나온다.

백제는 학교 설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고이왕 62년(285)에 왕인(王仁)이 『논어』와 『천자문』, 『주역』, 『산해경』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일본의 황태자를 교육하고 문자와 유교 사상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한 사실로 볼 때 신라나 고구려보다 앞서서 설치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유학사(儒學史)에 있어서 삼국시대에는 중국의 학제나 법제를 수입하여 이를 모방하였으며 정치사상이나 교육사상 등 제반 사회사상에 응용하였다. 충효정신은 국민윤리에, 임전무퇴의 충사상은 병역의 윤리에 응용하였으며, 심지어는 토지개혁의 제도와 정신까지도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신라 성덕왕 21년 8월조에 "비로소 백성에게 정전을 나누어주었다."고 한 것이 그 예이다. 맹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어진 정치는 반드시 토지의 개혁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으며 토지제도의 불균형은 빈부를 고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말 조선초]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기는 성리학 도입시기이다. 고려시대의 유학은 당나라 문학의 영향을 받아 문장학적 유학으로 점차 건전한 실학의 구실을 못하고 사장(詞章) 유학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유 . 불 . 도 삼교가 교섭하는 시대로서 한 사람이 삼교에 대한 지식과 조예가 깊었다고 하겠다.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일컬어 질 만큼 순수 유학자로 알려진 최충()은 고승들의 비문을 여러번 쓴 일이 있고, 김부식(金富軾)도 고려의 대각국사비를 찬(撰)하였다. 정몽주(鄭夢周)의 시문에도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으며, 권근(權近)의 『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은 불교와 유교를 비교하여 독특한 주석을 하고 있다. 이같이 당시의 학자들은 유학에 관한 조예는 물론 불교와 도교에 관한 조예도 상당히 깊었다.

고려 성종 때의 유학자인 최승로(崔承老)는 그의 28조 상소문 가운데 유·불·도 삼교의 특징을 들어 말하기를, 이 삼교는 각각 맡은 바 역할이 있으니 이를 행함에 있어 하나로 획일화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수양하는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다. 몸을 닦는 것은 내세를 위하는 것이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현세의 임무라고 하였다. 최승로가 상소문을 작성할 때 응용된 서책은 오경과 『논어』이다. 그는 항상 [득중론(得中論)]을 강조하여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알맞은 중용사상을 논술하였다.

고려말까지의 대표적인 학자로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유(安裕),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정몽주, 권근, 정도전(鄭道傳) 등을 열거할 수 있으나 그 가운데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는 대성전에 배향되었다. 대체로 이 무렵의 학풍은 한문학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며 유학사상 자체의 발달이 미숙하여 경전을 잘 이해하고 『사기(史記)』를 잘 알아서 정치상에 운용할 수 있는 관리가 되는 일과 시부와 문장을 잘 하는 문인이 되는 일에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학풍은 중국의 한당풍과 유사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은 민족적 특징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생각할 때 한·당학풍이라고 할지라도 민족적인 방향으로의 기반을 잃지 않으면서 주자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고려말의 정몽주의 학행은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말에 이르러 불교가 타락하여 사회가 퇴폐해지자 국민정신의 진작이 필요하게 되었다. 조선건국과 더불어 국민정신의 진작을 기하여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을 확립하자 비로소 주자학적 입장을 확보하게 되었다.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과 같이 불교를 배척하는 이론이 제 일차로 진행되고, 그 다음에는 이언적(李彦迪)의 [여망기당서(與忘機堂書)]에서와 같이 노장사상을 배척하게 되었다. 이황은 [여망기당서]에서 노불을 배척한 이론에 감탄하고 "오도(吾道)의 본원을 천명하고 이단의 사설을 물리쳤다."고 이언적을 높이 평가하여 찬양하기도 하였다. 조선조의 건국이 끝난 뒤로는 사상계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이른바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훈구파와 고려에 충의를 지키고자 했던 절의파가 그것이다. 이 때부터 불의(不義)의 문제를 철학에 묻는 학문연구의 방향이 일기 시작하였다. 조선초기는 주자학을 익혀가면서 성리학 전성기로 옮겨가는 과도기로 볼 수 있다. 정몽주 이래로 이어온 길재(吉再), 김종직(金宗直),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의 학맥을 이어 조광조(趙光祖)에서 대성한 도학사상은 의리를 높이고 권세를 천하게 보며 도심을 높이고 인욕을 누루는 강상을 세우려는 정신이다.

이 도학정신을 계승하여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체계화한 것이 다름 아닌 성리학의 이론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정치변동 속에서 충효와 의리가 문제 안 될 수 없고, 김종직의 사초(史草)나 사육신과 같은 사옥의 일은 한국유학의 발전과정이 사상에 반영된 것이다. 조광조가 급진파로 지목되어 보수파로부터 제거당하는 비극은 유학의 사정으로 볼 때 도학의 시련기요, 앞으로의 발전을 잉태하는 시기로 여겨진다. 사초나 사육신 문제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의리와 충효가 얽혀 있고 조광조의 기묘사화 이면에는 도학의 지치(至治)로 태평성대를 이룩하고자 하는 격군(格君)의 강인한 인간의지가 스며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인간관의 정치적 실현이 사화로 좌절되었을 때 학문적인 연구로 그 방향이 전환되어 갔음은 사리의 당연한 귀추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성리학은 중국과는 달리 한국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고 드디어 다음에 그 전성기를 초래하게 된다.


[조선중기]

조선중기는 성리학 융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서경덕(徐敬德), 이언적,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을 위시해서 조식(曺植),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장현광(張顯光) 등을 들 수 있다. 이언적은 무극태극(無極太極) 문제를 논한 한국 최초의 학자요, 서경덕은 중국의 기론(氣論)을 도입한 사람이요, 이황은 주자학의 정통을 계승하여 호발설(互發說)을 주장한 학자요, 이이는 한국 성리학을 정립하여 일도설(一途說)을 주창한 학자이다. 이 성리학 절정기의 이론은 호발설과 일도설로 요약된다.

한국 성리학이 중국 성리학과 다른 점은 객관적·우주론적 영역으로부터 주체적 인성론으로 문제를 보다 절실한 내면적 주체에서 체득하려고 하는 것이 중국 성리학 보다 일보 전진한 영역으로 그 방향을 돌려놓은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성실성과 실존성을 통하여 진리를 주체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이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심성론이다.

퇴계는 이(理)를 극히 존중하여 절대적인 것으로 높이는 동시에 천리는 만물을 명령하는 자리요, 아무 것에도 명령받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 가치관의 극치를 확립하였다. 율곡의 이기론은 이원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현실을 중시하여 이를 떠나서 기가 존재할 수 없고 기를 떠나서 리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기를 분리할 수 없다고 해서 순수한 이와 잡박(雜駁)한 기를 혼돈할 수는 없다. 이와 기가 분리되지 않으므로 기가 흐리면 이도 흐리게 보이고 기가 맑으면 이도 맑게 보인다. 이가 청탁이 있는 것은 이 자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기의 청탁에 따라 이가 청하게도 탁하게도 보이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가 흐릴까 염려할 것이 아니라 흐린 기질을 밝히는 데 근본 문제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의 원천도 하나 뿐이요, 기의 원천도 하나 뿐이라고 하였다. 이기가 분리되지 않는 이기의 일원처, 즉 이기지묘(理氣之妙)는 보기도 어렵고 보았다고 해도 설명하기 어려운 자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율곡의 문제는 기의 우위설이 아니라 이기지묘처가 해득하기 어려운 곳이라 하였다.

율곡은 추상적 원리를 현실에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여 보다 진실한 방향으로 이끌어 올려 이상적 상태로 승화시켜 가는 논리이다. 이 내면적 심성론이 후기에 이르러 의리학파, 절의파로 이행되어 한국 최근세사에 있어 외세의 침략과 더불어 이에 저항하는 절의파, 실천파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자학에서 도학사상, 성리사상, 의리사상, 의병정신으로 연결되어 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우리는 내적인 성실성만 가지고는 현실적 국제사회에 생존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되어 내실과 더불어 외실을 얻어 국력을 배양하고 실질을 숭상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조선후기]

조선후기의 유학은 실학사상을 중심으로 한다. 유학이 철학적으로 심화된 것은 성리학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후기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의 진수를 체득하여 구체적인 현실에서 공헌하기보다 이론적으로 추상화하여 현실을 도외시한 공리공론을 일삼아 마침내 학파와 정치적 당파가 혼선을 일으켜 당쟁의 도구로써 타락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건전한 국민 사상과 사회적 발전이 침체하여 민생이 점점 어렵게 됨을 바로 잡고자 일어난 것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다. 공소한 이론을 반대하여 현실적으로 구체적 실제사실에 나아가 사물을 연구하며, 인간과 사회를 건실하게 육성하려는 실학은 인간의 정신과학적 이론을 정치·경제·사회 모든 부문에 있어 실사구시의 입장에서 구명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전연구에 있어서도 확실한 고증에 의하여 진정한 의미를 이해해야 하며 따라서 공맹의 진의를 밝혀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송대의 이론 유학을 반성하여 현실사회에 알맞는 문물제도와 사회문화정책을 건전하게 실현하고자 하는데 그 특징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향의 모색은 성리학의 말기적 폐단을 구하는 새로운 학풍으로서 혁혁한 업적을 거두었다.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翼)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은 경세제민의 구체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논의하였으며, 과학적인 학문연구와 경험적인 사실을 중히 여긴 막대한 저술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성리학의 남은 폐해를 쇄신하여 새로운 사회건설을 하고자 청조의 새 문물을 수입하여 실천하기에 노력하였던 것이 이 실학파의 업적이며 공헌이라고 하겠다. 타락된 선비들의 정신적 청량제가 될 수 있는 문학작품으로서 박지원(朴趾源)의 『양반전』·『호질문』 등은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실학파들은 청조의 문물을 받아들여 배우기에 바빴으며, 당시 중국을 다녀온 사람으로서 청조의 문화를 구가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라든가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등은 청조문물을 소개하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해야 할 것은 유학을 실용주의사상이나 물질주의 경제이론으로만 단정한다면 정당한 견해라고 할 수 없다.

송대나 조선 중기의 성리학적 폐단을 시정하는 의미에서 실학이 대두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지세라 하겠지만 근래에 실학사상을 단순한 경제학이나 사회학과 같이 여기는 것은 다시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